15년차 진로진학상담교사로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김대선(제8대 전국진로진학상담교사협의회 회장, 광운인공지능고 진로진학상담교사)
2025년은 진로진학상담교사 제도 도입으로부터 15년, 진로교육법 제정으로부터는 1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2011년 진로진학상담교사 1기 연수생으로 출발하여 현재 15기 선생님께서 부전공 자격연수를 받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대한민국 진로교육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5,300여 명의 전국 진로진학상담교사들을 대표하는 단체의 회장이자 15년차 진로진학상담교사의 눈으로 본 대한민국 진로교육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2011년 평생 국어만 가르칠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어느 날 교장선생님께서 진로진학상담교사 선발 공문을 보여주시면서 도전해 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우리 학교 유일 전문상담교사 자격증 소지자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고민하는 나에게 교장선생님은 여러 가지 당근을 제시하였다. ‘부전공 연수만 다녀오면 교사 자격증 하나 더 취득할 수 있다’, ‘진로부장으로 업무 분장을 해주겠다’, ‘전문상담교사처럼 수업 말고 상담만 할 수 있다’, ‘연수받다가 싫으면 언제든 포기해도 좋다’와 같은 말들이었다. 마지막 약속이 가장 마음에 들어 부전공 자격연수를 신청했다.
학교 업무를 하면서 동·하계 합숙연수, 학기중 집합연수, 진로직업 체험연수 등 일 년 동안 600시간이라는 연수를 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특히 비장애인의 삶을 살다가 갑자기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던 1년 차 중증 지체장애인에게는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연수를 받으면 받을수록 교장선생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문상담과 진로진학상담은 전혀 다른 업무라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전문상담교사 자격증 소지자가 아닌 3학년 부장이나 진학 담당 교사가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진로진학상담교사로서의 사명감이 꿈틀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이라는 ‘자주인’이라는 인간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일환으로 창의적 체험활동 중 진로활동 신설, 고등학교에 이어 중학교에도 ‘진로와 직업’이라는 선택과목 신설, 대학의 입학사정관제 도입에 따른 중등학교 단계에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진로지도 등 진로교육을 매우 중요한 교육목표로 강조하였다. 이를 위하여 교육과학기술부는 2011년 중앙부처 수준에서 진로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진로교육과를 신설하였고, 16개 시도 교육청에 진로교육 전담 부서를 만들었으며, 전국 모든 고등학교에 1,500명의 진로진학상담교사를 배치하기에 이른다.
이는 국가적 교육사업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개혁이라 부를만한 제도 정비를 통해 입시 위주 경쟁 교육으로 황폐화한 대한민국 교육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대전환이었다. 이 의미 있고 야심 찬 프로젝트에 미약한 내가 함께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방에서 여름방학 합숙 연수 도중 욕창이 발생하여 휠체어에 앉아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꼭 이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메디폼을 덕지덕지 붙이며 이를 악물고 공부하였다. 나에게 배울 우리 학생들에게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조금이라도 피해를 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로진학상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진로진학상담교사로 전과하여 정식 발령을 받았다. 진로진학부장이 되었고, 학교의 진로교육을 총괄하게 되었다. 사명감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다. 전국에 있는 최고의 진로교육 강사들로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한국진로교육학회, 한국직업능력연구원, 한국고용정보원,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한국대학입학사정관협의회 등 한국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각종 진로 관련 기관들의 전문가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그 당시 개봉한 마블 영화에 등장하는 ‘묠니르’ 망치를 든 토르와 같이 ‘진로와 직업 교과서’를 든 진로의 신이 되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토르가 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시련에 부딪혔다.
국어를 가르칠 때 그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을 가진 학생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내신 성적도 나오지 않는 과목에, 꿈이니 행복이니 미래를 이야기하는 선생님에게 학생들은 하나도 흥미를 갖지 않았다. 동료 교사들에게는 담임도 안 해, 수업도 적어, 시험 문제도 안내서 좋겠다는 부러움의 말들이 비수처럼 꽂혔다. 학생 진로상담을 위해 나이스에서 학교생활기록부를 보려고 해도 교무부에서 거절하고, 커리어넷 진로심리검사를 하려고 컴퓨터실 사용 신청했더니 교육정보부에서 거절했다. 학생, 교사, 학부모 대상 진로 특강 및 연수를 진행하려고 했더니 관련 예산이 없으니 하지 말란다. 진로의 신은 어느 순간 학교에서 혼자 날뛰는 빌런이 되었고, 그렇게 조금씩 외롭게 고립되었다. 납작 엎드려 도와달라는 말을 연발하고 나서야 그나마 협조를 받아 일을 할 수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도대체 왜 진로가 중요한걸 모르지?!’ 불면의 밤이 자주 찾아왔다.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었다. 단위 학교 진로교육은 진로진학상담교사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을. 단 한 명의 교사가 학교 전체의 진로교육을 총괄하여 책임진다는 것 자체가 희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제도적 한계라는 것을. 나와 같은 고민을 다른 학교 진로 선생님들도 똑같이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렇게 서울진로진학상담교사협의회에 가입을 하였고, 서울중등진로와직업교과교육연구회 활동도 시작하였다. 같은 처지에 있는 진로 선생님들끼리 모여 수업 연구도 하고, 학생 상담 사례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업무의 고충을 털어놓으면 대처 방법과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이후 안정감을 찾은 나는 진로의 신이 아닌 단지 진로진학상담교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겸손한 자세로 학교 선생님들과의 협업 체계를 만들고, 관계 유지부터 신경 썼다. 진로교육은 그다음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조금씩 진로진학상담교사로서 인정을 받으며, 어느새 학생들이 찾아오는 선생님으로 거듭났다.
2013년 교육부는 ‘학생의 꿈과 끼를 살려 행복교육을 실현하는 중학교 자유학기제 시범 운영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 덴마크의 애프터스쿨, 영국의 갭이어 모델을 한국형으로 접목시켜 획일적 학력경쟁과 입시 위주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인성과 창의성을 기르는 진로탐색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공교육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다줄 제도였다.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한 입학사정관 제도가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여론의 질타에 휘청하고 있던 시기와 맞물리며 잔로교육 활성화 정책이 성공하겠느냐는 의문이 일었다. 그러나 진로체험지원센터 설치·운영과 관련한 교육부의 과감한 재정 투자와 더불어 이미 베테랑 진로진학상담교사들이 1명씩 배치된 상태였기에 큰 무리 없이 학교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부의 의욕적인 진로교육 정책에도 불구하고, 진로진학상담교사들은 언제 이 제도가 사라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안정적인 진로교육 내실화를 위해선 법적 기반에 따른 정책의 일관성이 필요했다. 그렇게 전국의 진로교사들의 염원을 담은 진로교육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마침내 2015년 6월 22일에 제정되기에 이른다. 진로교육법 제9조 1항 ‘교육부장관과 교육감은 초·중등학교에 학생의 진로교육을 전담하는 교사(이하 “진로전담교사”라 한다)를 둔다.’ 이 한 문장을 얻기 위해 그간 전국진교협 회장단이 불철주야 국회로 달려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진로교육법은 대한민국 진로교육의 모습을 많이 바꿔 놓았다. 정부는 5년 단위로 정부 차원의 진로교육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발표하게 되었고, 진로교육 현황을 조사하여 국가통계를 통해 연차별 진로교육 목표 관리 및 중간 점검 체계를 구축하였다. 교육부 국가진로교육센터를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 지정 위탁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 국가 단위 연구 및 진로교육 자료를 학교 현장에 적용하고 확산하는데 힘을 쏟았다. 진로교육 집중학년제 확대, 교과연계 진로교육, 진로교육 사각지대 해소 등 다양한 정책이 진로교육법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8년 교육자치 실현이라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진로교육도 교육부에서 17개 시도 교육청으로 대부분의 업무가 이관되었다. 지역의 특성과 여건에 맞는 교육 자치가 실현됨으로써 자치단체의 진로교육 참여를 더욱 확대할 수 있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지역별 재정 여건과 의사결정권자의 의지에 따라 금세 그 차이를 드러냈다. 진로진학상담교사 배치율이 99.9% 이르는 시도가 있는 반면 60%대에 머문 시도가 발생했음에도 교육자치라는 이름 뒤에 숨어 교육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학생들의 진로활동에 대한 만족도는 2018년까지 꾸준히 상승 기조를 보이다 이후 크게 하락하였다. 코로나19로 진로수업과 진로상담, 진로체험 등이 위축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그동안 벌려놓았던 진로교육 정책들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회 변화, 코로나19 등을 고려한 진로수업 자료 부족, 학생 수준을 고려한 진로체험 프로그램 제공 미흡, 창업가정신을 함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교육용 콘텐츠나 창업 체험 프로그램은 물론 창업분야 강사를 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 ‘진로연계교육’이 도입되었고, 고교학점제에 학생 개인별 진로학업설계가 중요하게 자리잡았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진로연계교육의 핵심은 초·중·고 학교급 연계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맞아들어가느냐에 그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 단계에서 진로탐색·설계 지원부터 시작하여 중학교 단계에서는 ‘진로와 직업’ 교과를 교양 선택이 아닌 모든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필수교과로 편성하여 1년 동안 최소 2단위는 이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 고등학교 단계에서 그것도 1학년 시기에 ‘진로와 직업’ 교과 2학점 이상 필수 이수를 통해 배워야만 학생들의 개인 맞춤형 진로학업설계가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성공적인 진로연계교육과 고교학점제 성공에는 진로 교과의 필수화와 더불어 이를 가르칠 양질의 진로진학상담교사 확보도 매우 중요하다. 미국의 고교학점제 제도에는 다수의 진로교사를 배치하여 한 학생에게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관리한다. 학생 맞춤형 진로상담을 위해서는 기존 진로부서의 역할 강화는 물론 진로진학상담교사를 부장교사로 지정해 고교학점제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학교 차원의 지원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현실은 어떠한가. 아직도 1명의 진로진학상담교사가 학교 전체 학생의 진로를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5년까지 30학급 이상 고등학교에 진로진학상담교사를 배치하고, 27년까지 중학교로 확대하겠다는 교육부의 약속은 예산 타령으로 속빈 강정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로교육법에서 말하는 진로전담교사를 지원하는 전문인력 배치는 사치다. 진로진학상담교사의 증원 배치 없이 2학점짜리 ‘진로와 직업’ 선택 교양 과목을 정규 교육과정으로 도입한 고등학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간신히 ‘창체 진로활동’으로 숨만 붙여놓은 수준에 불과하고, 진로 교육과정 편성 필수화는 시도교육청의 각종 교원대상 연수 시 진로교육 과정 편성 권고로 그쳤다. 부장교사로서 교육과정 편성에 적극 참여를 기대하는 진로진학상담교사는 아무도 없다. 교원단체들이 고교학점제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가운데 현재 고교학점제의 대상인 1학년 학생과 학부모님들은 정책의 피해자가 될까 불안해하고 있다. 대입 학생부 컨설팅을 위해 사교육 시장으로 달려가는 걸 막을 수 있는 공교육 전문가는 누구인가. 대안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로진학상담교사들을 투입하여 급한 불을 끄는 방법밖에는 없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의 진로교육은 어디에 서 있는가. 15년차 진로진학상담교사로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국진로진학상담교사협의회 회장으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찾은 답은 이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진로교육의 시작과 끝은 무엇이며, 우리가 진로교육을 통해 바꾸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교육 모델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있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피며 미래를 바라볼 때 새로운 대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과거의 틀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자세, 현재의 제도 개혁 필요성 인식, 진로교육법 개정을 통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치열한 토론과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2011년 진로진학상담교사를 배치할 때 우리들의 구호는 “진로가 미래다”였다. 15년이 흐른 지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진로가 미래다”를 외쳐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에게 다시 꿈과 희망을 찾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진로진학상담교사들이 가진 사명이다.